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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관광포털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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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치소(龍岩池) 전설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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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산면 대지리(大枝里, 가질마을) 뒷바위에 용마(龍馬) 발자국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못이 있다. 옛날 가질마을에 애기가 출생한지 삼일도 안 가서 방 구석구석 기어 다녔다. 괴이하게 여긴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애기가 커서 만약 역적이 된다면 앞으로 이 마을에 큰화가 닥쳐올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화를 막기 위해서 죽여 버리기로 하였다. 이 계획을 알아차린 애기는 펄쩍 뛰어서 선반 위에 숨어 있었다. 애기를 찾아 빨랫돌로 짓눌려 죽이자 뇌성벽력이 마을을 얼마 동안 뒤흔들었으며 그 때 난데없이 계속 울부짖다가 바위 밑 소(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애기장수가 탈 용마였으며 주인이 죽자 함께 죽은 것이다. 그 뒤부터 소 이름을 용암지(용치소)라 했다 하며, 그 바위를 마을 사람들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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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청(栢靑)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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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청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초인 성종(成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초인 선조(宣祖)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의 진사(進士) 김필경(金必慶)이 입주하여 흘리(屹里)라 했으며,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잣나뭇골이라 했으며, 또 망상골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박경룡(朴景龍)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 망상골(望霜谷, 忘霜谷, 忘星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으로 잣나뭇골 또는 백목동(栢木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백청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백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백청리의 위치는 동은 수리, 서는 영양군(英陽郡), 남은 보림리, 북은 울진군(蔚珍郡)으로, 삼승령 등 수봉(秀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망상골 : 잣나뭇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리가 오지 않음. *큰새골 : 백청리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허릿골(屹里) : 백청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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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寶林)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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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원씨(元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버임이라 했다 하며, 그 뒤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들어와 옷재(烏峴)라 하다가 보림으로 개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중동(寶中洞, 중말)을 병합하여 보림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보림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보림리의 위치는 동은 인천리, 서는 옷재(烏峴) 넘어 영양군, 남은 독경산(讀經山) 맥을 넘어 멀리 인천리, 갈천리가 있으며 북은 백청리가 있다. *거릿마 : 웃버임 앞길 옆에 있는 마을임. *중말(중마, 寶中洞) : 웃버임과 아릿버임 중간에 있는 마을임. *아릿버임 : 버임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버임(寶上洞) : 버임 위쪽에 있는 마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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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九美)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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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구비구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때(661~681)에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당시 마을 앞의 삼밭(麻田)을 이용하여 화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구마동(仇麻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읍내면(邑內面)에 소속되어 「구미마(仇尾麻)」「구마(仇麻)」등으로 불렀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에 의해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미리는 영덕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호(1913.12.29 公布)로 부군면(府郡面)을 자의로 폐합할 때 구미동이라 하여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9409호(1979.04.07 公布)에 의해 영덕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미리는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1988.04.30 公布)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미동은 구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리의 위치는 동쪽은 화수리와 이웃하며, 남쪽은 오십천과 무릉산이 있고, 서쪽은 지품면과 경계하고 북쪽은 화림산(華林山)이 있다. *새마을 (新村) : 구미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임 *재궁마 ·재삿마 ·수정동(水晶洞) : 15세기말(成宗 22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덕 입향조 (入鄕祖)인 신희(申禧)의 재실(齋室)인 수정재(水晶齋)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주막거리(거릿마을) : 구미리 남쪽 길가에 옛날 주막(酒幕)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개닥골 : 굴깨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행교골 : 중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남강서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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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華開)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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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동상동, 삼근동, 서상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화개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개리는 읍 소재지에 위치하는 마을로 동은 덕곡리, 서는 천전리와 지품면 오천리, 남은 남석리와 덕곡리, 북은 화수리와 구미리가 있다.동문밖(東門外) : 화개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성의 동문 밖이 되는 마을로 10세기 후기인 고려(高麗)시대에 주씨(朱氏)와 윤씨(尹氏)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동상동(東上洞) : 동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임. *삼근동(三近洞) : 동문 밖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읍(장터)이 가깝고(邑), 산이 가깝고(華林山), 물이 가깝다(五十川)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16세기경 안씨(安氏)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하며, 그 뒤 온양방씨(溫陽方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서상동(西上洞) : 동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임. *너더미골(미더미골) : 무덤골이 변해서 미더미골로 불려졌다. *너더미골(미더미골) : 당시 불교식 장례의식(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뼈가루를 담은 골호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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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南石)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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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리 동명의 유래는 남부동(南部洞)의 「남(南)」자와 비석동(碑石洞)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읍내면 지역으로 상장동(上場洞), 하장동(下場洞), 남부동(南部洞), 상남동(上南洞)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상장동, 하장동, 남부동, 상남동, 하남동, 중남동과 비석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남석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시켰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남석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남석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남부동(남문거리, 남부) : 남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 영덕읍성(盈德邑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는데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의 세 마을로 나누어 있었음. 비석동 : 조선시대 영덕 현령(縣令)의 치적불망비(治蹟不忘碑)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임. 상남문(上南門, 두들목) : 남문거리 위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에서 지대가 높은 곳이므로 일명 두들목이라 하였음. *장터(場基) : 중남문에 딸렸던 마을로 현재 학원(學院)이 있는 전방 3거리에는 4일장이 섰으며 양조장 앞에는 9일장이 섰다. 이 시장은 어물전이 이동하는 데 따라 곡류(穀類)와 잡화 등이 반대쪽에 서게 되었 다고 한다. 또 남문거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남문(下南門)이라 했으며 장터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장 (下場 : 하장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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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德谷)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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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리 동명의 유래는 덕천리(德川里)의 덕(德)자와 우곡리(右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내곡리(內谷里)의 곡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연간인 7세기 후반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하였고,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이 많은 곳과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하여 이렇게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내곡동, 외곡동, 덕천동, 우곡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덕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덕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곡리의 위치는 동은 덕곡천(德谷川)이 있으며, 서남은 남석리, 동남은 우곡리, 북은 화수리와 접해 있는 영덕읍 소재지의 중심마을이다. *골안(谷內) : 덕내(德川) 안쪽에 있는 마을. *덕내(德川) : 도매두들과 골안 사이에 있는 마을로 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임. *도 매 두 들 : 덕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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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川前)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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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동명의 유래는 내(川)가 앞(前)에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7세기 중기인 현종(顯宗)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 김취린(金就隣)의 후손들이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천전동이라 하여 영덕면의 관할로 하였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천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0.7km 떨어진 마을로 동은 오십천, 남석리, 서는 칠령산, 강구면 상직리, 남은 남산리, 북은 화개리가 있다. *아룻내(아릿내피, 下川前) : 내앞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내(웃내피, 上川前) : 내앞 윗쪽에 있는 마을임. *수운산 : 무릉산 *적은 덤배기 : 아룻내 서쪽에 있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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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南山)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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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 동명의 유래는 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 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개척했으며 그뒤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산 2리는 밀양손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일제(日帝)가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 할 때 우곡동(右谷洞)의 일부와 중남면(中南面) 둔리(屯里) 일부, 지곡동(枝谷洞)을 병합하여 남산(南山)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남산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시켰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남산리의 위치는 오십천 건너 강구면 금호리와 마주 보고 있으며, 뒤로는 칠령산(七嶺山)이 둘러싸고 있다. 남은 강구면과 경계인 입내산(入來山)이 있으며 북은 영덕대교가 있다.가짓골(枝谷, 가죽골) : 마을 형태가 나무가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두일(둔호) 서북쪽 골짜기에 있음. 조선시대에 갓바치들이 살았다고 하여 가죽골이라고도 함. *대밭골(竹山里, 절마) : 둔호 남쪽 두런산(입래산) 아래에 있는 마을임. *둔호(屯湖, 두일 屯里) : 남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마을 앞에 호수가 있음 *숲숲지 : 남산 1리로 마을 앞에 숲이 무성하다고 붙은 이름으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숲이 유실되었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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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右谷)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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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읍 남쪽 오른쪽 골짜기라 하여 우루실 또는 우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어느 때인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 읍내면 지역으로서 마을 남쪽에 강이 흐르므로 남강(南江)이라 불러오다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이 창건되자 서원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비석동 일부를 병합하여 우곡동이라 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우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고불봉과 강구면 하저리, 서는 오십천과 남석리, 남은 강구면 금호리, 북은 덕곡리와 연해 있으며 현 영덕읍 사무소에서 6백m 동쪽에 있다.남강서원 터 : 우곡리 169번지 일대에 있었던 남강서원의 터임. *댓대대 : 동리 동쪽 뒤에 있는 대나무 밭으로 고종 때 남강서원이 훼철될 때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양 선생의 위패를 묻었다고 함. *금산 삐알 : 남강서원이 있던 동쪽 뒤산 비탈로 금을 캤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 *호호대(浩浩臺) : 경관이 아름답고 이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일어난다고 한다. *망월봉(望月峯) : 모양이 望月(보름달)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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