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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관광포털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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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VR사이버투어

신돌석장군
신돌석장군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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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2
종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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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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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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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 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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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창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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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장군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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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2
종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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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장군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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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2
종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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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숙박/쇼핑 리스트이미지 없음
용치소(龍岩池) 전설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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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산면 대지리(大枝里, 가질마을) 뒷바위에 용마(龍馬) 발자국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못이 있다. 옛날 가질마을에 애기가 출생한지 삼일도 안 가서 방 구석구석 기어 다녔다. 괴이하게 여긴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애기가 커서 만약 역적이 된다면 앞으로 이 마을에 큰화가 닥쳐올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화를 막기 위해서 죽여 버리기로 하였다. 이 계획을 알아차린 애기는 펄쩍 뛰어서 선반 위에 숨어 있었다. 애기를 찾아 빨랫돌로 짓눌려 죽이자 뇌성벽력이 마을을 얼마 동안 뒤흔들었으며 그 때 난데없이 계속 울부짖다가 바위 밑 소(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애기장수가 탈 용마였으며 주인이 죽자 함께 죽은 것이다. 그 뒤부터 소 이름을 용암지(용치소)라 했다 하며, 그 바위를 마을 사람들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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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청(栢靑)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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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청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초인 성종(成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초인 선조(宣祖)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의 진사(進士) 김필경(金必慶)이 입주하여 흘리(屹里)라 했으며,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잣나뭇골이라 했으며, 또 망상골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박경룡(朴景龍)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 망상골(望霜谷, 忘霜谷, 忘星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으로 잣나뭇골 또는 백목동(栢木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백청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백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백청리의 위치는 동은 수리, 서는 영양군(英陽郡), 남은 보림리, 북은 울진군(蔚珍郡)으로, 삼승령 등 수봉(秀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망상골 : 잣나뭇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리가 오지 않음. *큰새골 : 백청리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허릿골(屹里) : 백청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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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寶林)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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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원씨(元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버임이라 했다 하며, 그 뒤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들어와 옷재(烏峴)라 하다가 보림으로 개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중동(寶中洞, 중말)을 병합하여 보림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보림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보림리의 위치는 동은 인천리, 서는 옷재(烏峴) 넘어 영양군, 남은 독경산(讀經山) 맥을 넘어 멀리 인천리, 갈천리가 있으며 북은 백청리가 있다. *거릿마 : 웃버임 앞길 옆에 있는 마을임. *중말(중마, 寶中洞) : 웃버임과 아릿버임 중간에 있는 마을임. *아릿버임 : 버임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버임(寶上洞) : 버임 위쪽에 있는 마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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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九美)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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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구비구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때(661~681)에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당시 마을 앞의 삼밭(麻田)을 이용하여 화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구마동(仇麻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읍내면(邑內面)에 소속되어 「구미마(仇尾麻)」「구마(仇麻)」등으로 불렀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에 의해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미리는 영덕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호(1913.12.29 公布)로 부군면(府郡面)을 자의로 폐합할 때 구미동이라 하여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9409호(1979.04.07 公布)에 의해 영덕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미리는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1988.04.30 公布)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미동은 구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리의 위치는 동쪽은 화수리와 이웃하며, 남쪽은 오십천과 무릉산이 있고, 서쪽은 지품면과 경계하고 북쪽은 화림산(華林山)이 있다. *새마을 (新村) : 구미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임 *재궁마 ·재삿마 ·수정동(水晶洞) : 15세기말(成宗 22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덕 입향조 (入鄕祖)인 신희(申禧)의 재실(齋室)인 수정재(水晶齋)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주막거리(거릿마을) : 구미리 남쪽 길가에 옛날 주막(酒幕)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개닥골 : 굴깨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행교골 : 중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남강서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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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華開)리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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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동상동, 삼근동, 서상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화개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개리는 읍 소재지에 위치하는 마을로 동은 덕곡리, 서는 천전리와 지품면 오천리, 남은 남석리와 덕곡리, 북은 화수리와 구미리가 있다.동문밖(東門外) : 화개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성의 동문 밖이 되는 마을로 10세기 후기인 고려(高麗)시대에 주씨(朱氏)와 윤씨(尹氏)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동상동(東上洞) : 동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임. *삼근동(三近洞) : 동문 밖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읍(장터)이 가깝고(邑), 산이 가깝고(華林山), 물이 가깝다(五十川)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16세기경 안씨(安氏)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하며, 그 뒤 온양방씨(溫陽方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서상동(西上洞) : 동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임. *너더미골(미더미골) : 무덤골이 변해서 미더미골로 불려졌다. *너더미골(미더미골) : 당시 불교식 장례의식(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뼈가루를 담은 골호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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