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신돌석장군은 1878년(고종 5년) 음력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
에서 부친 신석주(申錫柱)와 모친 분성(盆城) 김씨 사이에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며, 우리가 부르는 신돌석이란 이름은 어릴 때 불렀던 아명(兒名)이며,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6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장군 19세 때 영해에서 중장군이 되어 영덕 남천쑤(남천숲) 전투를 치렀다는 의병활동이 전해지며, 10년 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인 1906년 4월 6일(음력 3.13) 그의 집에서 약 100m 떨어진 주점에서 200~300여명이 모여 영해를 중심으로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창의하였는데, 영릉은 영해(寧海)와 강릉(江陵), 즉 동해안의 경북과 강원도 중심지역을 연결하는 넓은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의지 표명인 것이며, 거병한 곳에서 바로 앞 상원마을의 개천가 숲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남쪽 맞은편에 우뚝 솟아 있는 고래산 중턱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또한 영릉의진의 편제는 해방직후에 작성된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에서 61명의 대표적인 인물과 그들이 맡았던 직책이 기록되어 있는데, 영릉의진의 구성원이 평민이나 하층민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신돌석장군 보다도 신분이 높은 지역 문중 사람들도 함께 하고 있어, 사회적 신분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되고 있다.
신돌석장군의 부대는 영덕과 청송, 영양, 영해 일대에서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무기, 식량을 확보하고 삼척, 울진지역의 일본군 전진기지를 2년 6개월간 6차례나 집중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리는 신돌석 장군의 행적으로 사람들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이렇게 평민의병장으로서 장군의 명성과 전과는 당시 유림 중심의 의병활동을 전국민의 항일의병 활동으로 확대 발전시켰으며, 장군은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장들이 모여 13도창의군을 결성할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후반기부터 일본군이 계속 증원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의병토벌대의 작전이 거듭되어 점차 의병활동이 위축되고 결국 장군의 해산명령을 받은 의병들은 자진해산 혹은 투항하였다. 이에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투쟁을 계획하려 했으나 1908년 12월 12일(음11.19) 지품면 눌곡리에서 현상금을 탐낸 주민에 의해 살해되어 불과 30세의 짧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5등급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신돌석장군의 묘소는 1971년 장군의 생가 마을 뒷산에서 국립현충원 애국자 묘역(131호)으로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