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각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뒤로 뻗은 칠보산의 산맥과 하천의 형상이 마치 용의 뿔과 같이 생겼으므로 각실(角室), 각리 또는 각시랍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각리 1리는 고려(高麗) 말기에 대흥백씨(大興白氏 : 水原白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다가 임오년 대홍수로 용두천(龍頭川)이 범람하고 마을이 폐허가 되자 백씨는 떠나가고 뒤에 남씨, 권씨,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각리 2리는 고려말 주씨(朱氏), 우씨(禹氏) 등이 들어와 다래넝쿨을 헤치며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다릿골로 불렀다 하며, 그 뒤 조선 전기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세조(世組)가 왕위에 오르자 당시 호조판서(戶曹判書)였던 명은(溟隱) 윤황(尹煌)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달은 볼 수 있다고 해서 다릿골 또는 월의(月宜)가 되었다고도 한다. 각리 3리는 고려말 왕삼(王參)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정직한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어느실(彦谷)이라 했다 하며 또는 황토물이 굽이쳐 흘렀다 하여 주니곡(朱泥谷) 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1895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으로 각시랍, 다릿골(月宜), 논골, 어느실(彦谷) 등 자연마을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이 지역을 병합하여 각리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각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각리 1리(각실앞), 2리(다릿골,논골), 3리(어느실)로 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덕천리,원황리, 서는 창수면과 면계를 이루고, 남은 사천리,신평리, 북은 이천리가 있다. 이 마을 뒤에는 칠보산의 크고 작은 산맥이 둘러 있다. *대장수(大長水) : 발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울의 이름을 딴 마을임. *발새재 : 발재 밑에 있는 마을임. *다릿골(月宜) : 각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임. *어느실(彦谷) : 각리 서쪽에 있는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