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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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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내 각 지역 역사문화권

圏域

역사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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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内容

각기 두권역으로 나눈 역사문화코스를 제안

企画のも

영덕의 각지역중 역사,문화와 관련된 지역들을 이해하고 재조명하여 코스로서 제안한다.

評価レビュ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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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테마여행 메인이미지







역사문화탐방코스


1. 해양역사투어권

장사해수욕장(6.25)~ 삼사해상공원(6.25/ 구한말)&어촌민속전시관(영덕역사)~대소산봉수대(조선)~괴시리전통마을(조선역사전통)&목은이색기념관(고려인물역사)~ 대진해수욕장(구한말 의병)


2. 내륙역사투어권

풍력발전단지 신득청가사문학비(고려인물역사)~ 신돌석장군유적지&생가(구한말의병)~3.1의거탑(구한말)~인량리전통마을(역사전통)~나옹왕사반송유적지(인물역사)~장육사(고려인물역사)~유금사(신라역사)





영덕에는 역사적 가치와 전통마을, 그리고 역사를 빛내준 인물들이 많다.

영덕의 곳곳에 베여있는 그 사적가치나 인물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문화탐방을 시작해보자.


1.먼저 해양역사문화투어권을 따라가 보자~


장사해수욕장/ 남정면

반세기에 십년을 더한 역사 속에 고스란히 묻힌 젊디젊은 충혼들의 넋이 담긴 장사해수욕장!

그 끝없는 백사장 명사십리의 역사적인 운치와 의미가 가슴 밑바닥까지 들어찬다.


영덕의 가장 남쪽 7번국도변과 해안가가 같이 만나는 곳에 영덕의 3대 해수욕장, 장사해수욕장이 있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만으론 이곳이 역사적인 피와 땀이 스민 사적지라곤 상상할 수 없지만, 분명 이곳은 6.25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병들이 상륙하여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곳이며,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 서있다.




삼사해상공원&어촌민속전시관/ 삼사리

전망의 여흥을 더하기 위한 모든 장치가 마련된 "동해의 기상을 품어 안고 푸른바다를 노래하는 삼사해상공원"과

어촌을 담은 영덕의 아름다움을 갖가지 테마로 선보여주는 영덕어촌민속전시관


‘이북도민 망향탑’과 ‘무공수훈유공자비’에 아로 새겨진 통일염원, 드넓은 삼사해상공원의 광장에서 또 한명의 김한홍선생의 미국기행가사 ‘해유가 비문’을 살짜기 살펴본 다음 영덕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모아놓은 어촌민속전시관에 들러보아야 한다.


영덕과 바다에 대한 박물관 같은 정보와, 진짜 바닷 속 같은 시원함, 동해전망과 어울어진 각층의 다양한 볼거리들을 맞이해 볼 수 있다.

‘영덕의 아름다움’이 테마로 묻어나는 영덕인의 삶/ ‘영덕, 어촌을 담다’ 테마로 항구와 지형, 어종과 대게일생을/ 아이들을 위해 빼먹지 말아야 할 체험코스- ‘바다항해 가상체험’과 ‘대게잡이 가상체험’, 3D입체영상관을 관람과 「어류화석전시실」을 둘러보며 영덕을 송두리째 이해하게 된다.




대소산봉수대/축산면 도곡리

횃불과 연기로 영덕 남동쪽 해안의 상황을 중앙으로 알려내던 조선 초기 주요 통신시설

대소산봉수대는 바람이 휘감아도는 영덕의 허리에서 선조들의 치열했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의 하나인 대소산봉수대는 그 흔적이 가장 뚜렷이 남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곳으로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알려내었던 곳. 남쪽으로 별반산 봉수대와 서쪽으로는 광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후포의 후리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마지막으로 서울의 남산봉수대까지 연락을 취하도록 되어있다.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급한 변방의 동태를 중앙으로 알리던 통신시설로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 비상시에 대처했다. 대소산 봉수대는 영덕 남동쪽 해안의 주동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만든 것이라 한다. 봉분처럼 생겨 꼭대기에는 방어벽을 돌로 쌓고, 성 안에는 원추모양의 형태를 남겼다. 경상북도지정 기념물 제37호에 지정돼 있다.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면 축산항의 전경과 그 너머 아늑히 동해바다의 진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괴시리전통마을/ 영해읍 괴시리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동해 양반마을의 고풍스런 얼이 담긴 괴시리전통마을.

학식과 인품으로 모범적인 영양남씨 집성촌에는 물소와 서당, 괴시파종택 등 14점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망일봉을 끼고 영해평야를 바라보는 마을. 마을 북쪽에도 도랑이 있어 엣날에 ''호지촌''이라 불리었던 이 마을은 고려말 대문호이자 충신인 목은 이색의 고향이자, 생가지터의 마을이다. 지금은 연꽃과 두 그루 묵은 고목, 그리고 200년된 옛 길 등이 그대로 남아 조선후기 영양남씨 집성촌의 반촌의 형태만 남아있지만 유지되는 30여 가옥들에는 살림집들도 남아있어 시대상을 반영한 주거의 모습에 눈여겨 볼 수 있다. 물론 주말을 이용한 고택체험집에서의 체험들과 한옥민박 등으로 고택의 따사로운 정겨움에 푹 빠져볼 수도 있고 말이다. 조선후기의 물소와 해촌고택 등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 외에도 여러 고택의 형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경북지방 양반가의 주택문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반촌, 괴시리전통마을이다. 마을위쪽으로 이어진 목은이색기념관에는 고려말의 충신이자 재상, 뛰어난 문인 목은이색의 생애와 사상을 집결해놓은 홀연한 그의 터를 만날 수 있고, 블루로드가 이어진 뒷길은 목은이색산책로에서 대진의 관어대와 고래불까지 이색선생이 유년시절 흔적을 더듬어볼 수도 있다.




대진해수욕장

벽산도해단비문/ 영해면 대진리

구한말 의병활동을 전개한 벽산 김도현 선생의 우국충정의 한이 잠재워진 대진해수욕장


대진해수욕장 인근의 대진1리 마을 한 켠에선 경건한 ''벽산 도해단 비문''을 만날 수 있다. 대진의 서정에 비감을 더해주는 이곳은... 구한말 의병활동을 전개한 벽산 김도현 선생의 사연이 잠들어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사재를 털어 군기를 마련하고 의병을 일으켜 안동, 함창, 의성과 강원도 등에서 왜군과 싸워온 그가 의병활동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고향 영덕에 귀의해 人才양성의 꿈을 키우다, 나라가 경술국치로 더 이상 갈곳없게되자 망국의 땅에선 묻힐 곳도 없다하며 대진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영덕의 바다인 동해안은 비운의 나라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마다 한서린 울분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장사의 상륙작전비문이 그렇고 대진의 벽산도해단 비문도 그렇다. 끝없는 아름다움 속에는 이면적으로 한없는 비애가 서려있는 아이러니일까 영덕의 바다가 더욱 신비로운 까닭은 바다에 감추어진 애달픈 한이 스며있어서인지 모른다.




2. 두 번째로 영덕의 내륙 역사문화투어권이다~


풍력발전단지 신득청가사문학비

(고려인물역사)/영덕읍 창포리

고려말기 왕의 실정을 간언하고자 고려말 가사문학의 효시- ''역대전리가''를 지어 올린 신득청선생의 가사문학비


풍력발전단지의 신재생에너지전시관 앞에서 마주한 신득청 가사문학비-역대전리가.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신득청선생은 고려 충숙왕 때 이곳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나, 평산 부원군까지 지낸 인물로 고려말 공민왕의 실정을 간언하는 이 ‘역대전리가’를 지어 올리나 조정은 더욱 혼란지색에 빠진다. 벼슬을 버리고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온 선생은 고려 멸망을 듣고 동해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해 버리고 만다. 그가 남긴 이 역대전리가는 한국문학사에 있어 가사문학작품의 효시로 재조명되어 그의 우국충정과 함께 칭송되고 있으며, 나옹왕사와 함께 영덕이 가사문학의 본산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는 귀한 가치인 것이다. “나라 세워 다스려 사직을 편안히 함은 앞 시대 나라를 일으킨 임금 같고 나라를 어지럽혀 사직을 강하게 함은 앞 시대 못난 임금과 같도다 ~~~~”




신돌석장군유적지&생가/ 축산면 도곡리

우리나라 최초의 평민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의병장 신돌석!

그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 설립된 신돌석장군유적지&생가에서 그의 항일정신과 함께 구국의 혼과 얼을 되새긴다.


구한말 나라가 처한 위기 앞에 당당히 맞선 평민 의병대장 ? 신돌석! 영덕이 낳은 최고의 인물 중의 신돌석을 만나러 가보자. 고향땅 영해에서 100여명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맞서온 신돌석. 지역민들의 협조 속에 영양, 영해, 영주, 울진 할 것 없이 다양한 공격과 교전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게릴라적 전투로 일제에 타격을 주며 대항하고 많은 성과를 보였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상금에 눈이 먼 친구로부터의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신이장군. 관의 나이에 의병을 조직하고 일어선 그가, 나라위해 싸운 십여 년의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영덕군은 1995년에 축산면 도곡2리에 그의 생가지를 복원하고, 1999년, 맞은 편 도곡1리에 유적지를 마련한다. 신돌석장군 기념관에는 일제의 침략과 의병활동, 영덕지역의 항일운동, 신장군의 약력과 설화, 그림으로 보는 신장군 일대기 등 자료와 신장군이 사용했던 장도, 일기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혼을 모셔놓은 충의사와 동재?서재를 둘러보며 충절정신을 체험할 수 있다. 풍전등화의 조국현실을 개탄하고 일제의 탄압에 의병을 조직해 맞섰던 청년대장. 그의 고귀한 기상과 애달픈 우국충정에 감회가 숙연해진다.




3.1의거탑 /영해읍

1919년 3월 18일 영해장날을 기해 북부 4개 면민 3천여 명이 장터에서 일으켰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탑이다.


영해읍 성내리에는 규모가 꽤 큰, 그러나 낡은 옛 형태 그대로 머물고 있는 읍내 시장 규모 이상을 차지하는 영해장터가 있고, 장터 앞 로터리엔 우뚝 솟아있는 3.1의거탑이 있다. 매년 3.1절을 맞아 영해 로터리에서 기념탑까지 만세대행진과 합동추념식을 개최하고, 2월 28일 저녁에는 전야행사로 신돌석장군 의병출정식과 횃불점화봉송 및 행진이 있다.




인량리전통마을/ 창수면 인량리

선비의 문과 도가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며 수많은 인재들이 각지에 배출되어온 영덕 最古의 전통

500년 전통과 얼이 담긴 인량리전통마을


장육사에서 다시 돌아나오면 창수면 인량리로 가는 길이 보인다. 또는 영해사거리에서 오른쪽 창수?영양방면으로 남 918번 지방도로를 따라 2.2km가 원구교를 건너면 길 오른쪽에 인량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2km정도 가면 인량리 입구 인량 버스정류장이 보이면 바로 이곳부터가 인량리 전통마을의 시작이다. 안동 못지않게 예를 숭상하고 풍속이 엄격하다 하여 ''작은 안동''이라고 불리던 영덕의 면면이 스며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전인 중종 무렵에 들어서기 시작한 이 마을은 북쪽으로 멀리 태백산맥이 둘러섰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탁 트여서 들판 가운데로 송천이 흐르고, 마을은 동서로 길게 누워있다. 마을 전체에 중요민족자료 168호인 충효당을 비롯하여 몇백 년 해묵은 기와집이 여러 채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엔 농촌 전통 테마마을인 나라골보리말체험학교가 있다. 수백년 된 기와집들로 이루어진 전통마을.. 일찍이 어질고 인자한 현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마을 지명까지 ''인량리''인 이곳이 영덕의 정신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나옹왕사반송유적지/ 창수면 신기리

나옹왕사가 출가 전 반송을 꽂아 유명해진 나옹왕사 반송유적지는

하늘의 비호를 받고 살아나 훗날 고려 말 우왕의 책사로 나라를 다스린 나옹왕사의 일대기가 담겨있다.


영해사거리에서 창수, 영양 방면으로 난 918번 지방도로 따라 5.6km정도 가면 창수 면소재지인 신기리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 바로 나옹왕사가 출가 전 반송을 꽂아 유명해진 나옹왕사반송유적지가 있다. 1320년, 이 창수면 가신리 불미골 이 근교에서에서 범상치 않은 태몽의 나옹왕사(1320~1376)가 태어난다. 가난하게 살다 세금마저 내지 못해 끌려가는 어미 뱃속에서 가까스로.. 그가 태어난 곳은 바로 영해부 관가로 끌려가는 길의 시내가- 까치소였다. 출생과 동시에 어미를 잃은 핏덩이를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니, 하늘의 비호를 받고 살아난 이 아기가 바로 훗날 영해를 빛내고 고려말 나라를 쥐고 흔든 왕사가 된 것이다. 우왕이 즉위한 후에 ''왕사''로 봉해지는데 이는 그의 32 제자 중 최고였던 무학대사에까지 영향을 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진 지공-나옹-무학의 3대 고승은, 인근 나옹왕사가 창건한 장육사의 홍련암에 모셔져 있다. 물론 나옹왕사는 자기가 태어난 곳 가까이에 최초 터를 잡고 사찰을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장육사였다.




장육사/ 창수면 갈천리

구름이 쉬어가는 운서산자락에 고려시대 나옹왕사가 창건한 절로 유명한 장육사.

인간사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자연과 벗하며 마음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된다.


신기삼거리- 나옹왕사반송유적지에서 다시 오른쪽 오촌리로 난 920번 지방도로를 접어들면, 양 옆으로 높낮이가 서로 다른 산들에 에워쌓인 채 한참의 산길을 달리면 창수면 갈천리가 나오고, 이 갈천리 가을면산, 즉 운서산 기인 여운 아래, 숲 좋고 물 맑은 곳에 바로 장륙사가 있다. 서기 1355년에 나옹왕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이곳엔 유형문화재 제138호 대웅전과 보물 제993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 등 4점의 문화재와 보물이 담겨있다. 영덕에 위치하지만, 영남의 동해안-포항, 청송, 영양, 울진에 이르기까지 경북 동해안 유일의 템플스테이 사찰이다. 운서산세 그윽한 정취 속에 숲 좋고 물 맑은 자연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사찰체험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다.




유금사/ 병곡면 금곡리

통일신라시대 세운 삼층 석탑이 창건 당시의 유일한 건축물로 남아 장화부인과 마의 태자의 사랑의 메아리를 담아 전해오는 곳!


칠보산으로 향하는 산길을 쉼 없이 오르고 내리다 보면 중턱 즈음, 작은 산촌마을이 보이고 그 길을 굽어 들어가면 신라시대 창건된 소담한 한 채의 절이 나온다. 소박한 풍채의 유금사_ 비록 소실되고 유실된 후 거의가 복원되어 태초의 모습이라곤 삼층석탑이 전부인 듯한, 그러나 꾸미지 않은 절의 자연스러움에 매료될 수 있는 곳이다. 또 국운이 쇠한 신라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음에 한스러움 죽음을 택한 마의태자의 슬픈 운명과,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의 장화부인과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감도는 곳이다. 법당 뒷마당에는 국가지정보물인 유금사삼층석탑이 역시 유금사를 닮아 소박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형태그대로를 보인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알 수 있는 영덕의 정신문화와 전통의 역사, 또는 쓰라린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산 현장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