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및육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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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및 육영루는 영양남씨 자손들이 송정 남수(1395∼1477)의 덕을 기리어 건립한 것으로, 화재는 남수를 제사 지내기 위한 재실이며 육영루는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강당이다. 산을 등지고 왼쪽에 화재가 있고 오른쪽에 육영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수는 조선 태종 때에 벼슬길에 올라 용담현령까지 지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문을 닫고 사람을 대하지 아니했다 하여 단묘유신(端廟遺臣)이라 추앙을 받았다고 전한다. 현재 영양남씨의 90%가 그의 자손이라 한다. 화재는 경사진 대지 위에 정면 5칸·측면 5칸 규모로 세워졌다. 건물의 평면은 ‘ㅁ’자형으로 각리언곡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8호)와 비슷하다. 앞쪽 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고방과 부엌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2칸통의 온돌방이 위치하고 있다. 온돌방 뒤쪽으로 우익사 3칸이 이어져 있다. 온돌방에 이어서 고방이 자리하고 그 뒤쪽으로 육영루와 통하는 통례칸이 있다. 부엌과 연결되는 좌익사는 온돌방 한 칸과 2칸통의 온돌방이 수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부분은 가운데 3칸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상부가구는 장식성 요소가 전혀 없는 3량구조법이며 벽체는 모두 시멘트 몰탈로 마감되었다. 화재 오른쪽에 자리한 육영루는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정자형 건물이다. 대지의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으나 전면은 완전한 중층형으로 꾸몄다. 퇴칸 전면에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정자의 높직한 맛을 주었으며, 상부가구는 판대공을 세운 5량구조이며 팔작지붕을 얹졌다. 외벽과 기단은 화재와 마찬가지로 시멘트 몰탈로 마감되었다. ‘육영루기(毓英樓記)’에 의하면 육영루는 조선 영조 50년(1774)에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화재의 안대청 상부 상량문에 의하면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재 및 육영루는 비록 중건된 건물이지만 향토의 문화유산이라는 입장에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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