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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장군유적지&생가

맞춤형

호국의길탐방 상세정보

관광지명

신돌석장군유적지&생가

위치

축산면 도곡리

권역

역사문화권

TEXT유형

01

내용

신돌석장군유적지, 생가

기획의도

영해가 낳은 조선후기 명장, 약관의 나이에 평민이자 의병대장으로서 활약한 예는 드물다. 그의 충혼과 넋이 서린 유적지와 생가를 돌아보며 한많은 짧은 생을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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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지켜온 땅에서 장군의 넋을 기리다!
그 어떤 기개와 담력이 어린나이의 자신을 이 크나큰 대의로 이끌었을까? "키는 오척 육촌이었으며, 체격은 비대했고 얼굴을 크고도 넓었다. 피부는 검은 색이었고,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엷게 배어 있었다."
그의 외모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그저 젊은 혈기의 치기라 하기엔 그 조직력이나, 치밀함이 너무도 비상하고 뛰어났다.
신돌석장군 생가
축산면 도곡 2리 마을회관 앞에 이르면 돌우물이 가지런한 작은 초가집 두 채를 만난다.

7대조가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의 후예지만 이후로는 문한이 끊겨 평민의 자식으로, 그 조차 평민이란 수식어를 붙여 자라난 신돌석. 하지만 그 당시 신분을 제한시키기 위한 태생의 한계인 ''평민''이란 두 글자가 신돌석이란 인품을 품어주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어려서부터 명민함이 남달라 양반만을 가르치던 육이당 이중립에서 글을 배우고 틈틈이 병서를 익히며 무예를 닦아온 신돌석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일로로 치닫자 끓어오르는 우국지정을 누르지 못하고, 의병을 조직하고 나선다. 그의 나이 약관 19세의 일이다. 지금으로 치면 수능이나 준비할, 시쳇말로 코흘리개 나이가 아닌가. 나라의 흥망성쇠에 비분강개할 거시기가 아니란 말이다.
''타고났다'', 아니면 ''하늘이 내렸다''라는 문구 말고는 다른 표현이 무색해질 노릇이다. 1878년 태어난 그가 유달리 담대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당시 나라 분위기가 그랬다곤 하더라도, 그가 오늘날 이리도 추앙받아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마땅하다. 그 어떤 역사책을 다 뒤져봐도 국운이 쇠퇴한 시대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들은 많지만 이토록 철부지(?)나이에, 그것도 평민이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예는 전무하기 때문이리라.
그 어떤 기개와 담력이 어린나이의 자신을 이같이 크나큰 대의로 이끌었을까?
"키는 오척 육촌이었으며, 체격은 비대했고 얼굴을 크고도 넓었다. 피부는 검은 색이었고,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엷게 배어 있었다." 그의 외모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그저 젊은 혈기에, 치기를 부렸다 하기엔 그 조직력이나, 치밀함이 너무도 비상하고 뛰어났다. "신들린 듯이", "신출귀몰 했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그의 행적을 평가하는 표현들만 봐도 그는 과히 "난" 인간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전답을 모두 팔아 아들의 거사를 도와주었다. 고향땅 영해에서 100여명 의병을 조직해 일어선 신돌석은 해산과 몰락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다시 둥지를 틀고 조직을 규합하고 나선다. 평민출신이었기에 이점도 있었다. 영릉의진에 농민과 포수, 천민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듬해 1907년엔 3000천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그의 신분적인 특성이 장점으로 작용했던 연유로 파악된다. 영양, 영해, 영주, 울진 할 것 없이 다양한 공격과 교전에서 승전보를 울려냈다. 신돌석부대는 군율이 엄하고 민폐를 끼침이 없어 가는 데마다 환대를 받으며 혁혁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큰 인물일수록 큰 아픔도 감내해야 하는 법, 신이 내린 장수 신돌석에게도 위기는 찾아오고야 만다. 처와 아들이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일제가 점차 토벌을 강화해오자 의병장들이 하나씩 쓰러져가는 위기에 쳐하게 된다. 1908년, 일단 해산을 선포하고 은거에 들어가게 되는데 ...
움츠리지 말았어야 했는가? 목숨을 내걸고 끝까지 싸웠더라면 그리 허망한 최후를 맡진 않았을 텐데... 믿고 은신처로 택한 김상렬, 상호 형제에게, 상금에 눈이 먼 배신의 원수에게 기어이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야말로, 한 맺힌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의 일이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 구나"
신돌석장군유적지
그의 유해는 서울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지난 1963년에야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고, 지금 이 생가가 1995년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9년에 와서야 그를 기념하는 신돌석 장군 기념관과 유적지가 축산면 도곡1리(생가지와 7번국도를 사이에 둔)에 세워지게 되었다. 참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가 한 서린 죽음 후,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를 추념하게 되었다니.. 유적지에는 장군의 혼을 모시는 충의사와 동재?서재가 있어 충절정신을 체험할 수도 있고, 매년 6월에는 화림정에서 장군의 기상을 살리고자 신돌석장군 배 전국남녀궁도대회와 영덕군 주최의 행사도 마련되고 있다.
풍전등화의 조국현실을 개탄하여 약관의 나이에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거세디 거센 일제의 탄압에 온몸으로 맞섰던 우국충정의 청년대장 신돌석.. 복사꽃 하늘아래 다 못 피운 그 청춘의 넋이, 우국의 한이 봄눈 되어 흩뿌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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